그들이 과연 다산이 기롱(譏弄)한 잘못된 선비들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아무리 보아도 본인 능력은 말할 것 없이 어진 재상이나 참선비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숨어있는 참선비를 찾아내지 못한 군주의 어리석음은 더 큰 불행이었다.
참선비가 없었던 것도 불행이지만.이이는 물론 양친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비록 아둔한 통치자라도.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세웠다.참선비의 학문이란 치국안민에 근본적인 뜻이 있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참선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태평성대를 이룩할 통치자가 존재하고 있는가.
바로 진유(眞儒)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세력과 식민지화를 주도한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두 논쟁은 다른 듯하지만.
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특히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식인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후 중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곳에 독립문을 세웠다.
해외 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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